Twitter Facebook Google+ Flickr Tumblr
Comments Closed

“영화가 끝나고, 주문이 풀리면, 영화는 마치 입 안의 솜사탕처럼 녹아 사라진다” 뉴요커의 《미녀와 야수》 리뷰에 나오는 말이다. 2017년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는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영화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어쩐지 기억에 남는 건 많지 않다. 2017년 작품의 원작이었던 91년의 애니메이션은 어땠을까? 아마 이 스토리의 가장 널리 알려진 교훈이라면, ‘외면의 아름다움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정도일 것이다. 야수가 가진 내면의 아름다움을 외면의 아름다움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현명한 미녀 벨은 결국 잘생긴 왕자와 그가 가진 부를 모두 얻게된다.[1]

하지만 정말 이 오래된 이야기의 교훈이 그걸로 끝일까? 91년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되었던 작품은 1740년 프랑스의 소설가, 가브리엘-쉬잔 바르보 드 빌레느브가 쓴 이야기다. 애초의 야수는 코끼리와 물고기를 섞어 놓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혼종이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1756년 이를 아이들이 읽기 좋게 동화로 각색한 장 마리 르프랭스 보몽의 작품이 좀 더 유명하다. 보몽의 작품에서 야수의 생김새는 상상에 맡겨지고, 정확히 묘사되지 않는다. 그 이후 이 이야기는 현대의 신화가 됐다. 그렇다면, 1700년대에도 이야기의 교훈은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중요성’이었을까? 미네소타 대학의 교수, 잭 자이프는 1983년 자신의 책에서 “사회의 남성 일원이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과 동화에 내재된 의미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으면, 동화는 신화가 되지 않는다.”고 썼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못생긴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얻기 위해 이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다소 피상적인 분석일뿐,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미녀와 야수》 이야기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미덕을 (남성 중심적인 시각으로 여성에게) 홍보한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적절하다. 동물 신랑(혹은 신부)과 사람 신부(혹은 신랑)가 나오는 설화에 대한 책을 쓴 마리아 타타르는 표면적으로 아버지 대신 자신이 갇히기로 결정한 미녀의 희생 정신이 강조되지만, 이것이 실제로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야수의 의지에 순종하는 관계”를 뜻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미녀와 야수》 이야기 속에 담긴 문화적 함의들은 꽤나 결혼의 그것과 비슷하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 집을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새로운 관계를 만들면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 말이다. 미녀가 이 모든 두려움을 극복했을 때, 부와 잘생긴 남편을 얻는다는 것을 떠올리면, 훌륭한 결혼 장려 설화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미녀와 야수》 같은 이야기는 또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큐피드와 프시케 이야기 속에서 프시케는 결코 남편의 얼굴을 봐서는 안된다는 경고와 함께 괴물과 결혼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경고를 무시하고, 남편의 얼굴을 몰래 확인한 프시케는 남편이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신, 큐피드라는 걸 알게 되지만, 경고를 무시한 댓가로 남편을 잃고, 남편의 어머니인 비너스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갖은 고난을 겪는다. 옛날 이야기뿐이 아니다. 《킹콩》에서 여주인공이 킹콩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기억나는가?[2]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여자가 야수고, 남자가 사람인 경우다. 《백조 아가씨》 설화에서 사냥꾼은 젊은 여성들이 깃털로 만들어진 옷을 벗고 호수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사냥꾼은 그 중 옷 한 벌을 숨긴다. 다른 이들이 깃털옷을 입고 백조가 되어 날아가는 동안, 옷을 빼앗긴 여성은 사람의 형태로 남아 사냥꾼과 결혼하게 된다. 그들은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지만, 숨겨둔 깃털옷을 여자가 발견했을 때, 여자는 옷을 입고 백조가 되어 사라진다. 남여가 뒤바뀐 반대의 이야기니, 이번엔 ’사회의 여성 일원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내용’이 들어가 있을까?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이 이야기는 남성 독자들에게 잠재적으로 여성은 다르다고, 여자들은 야생에 더 가깝고, 길들여지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타타르는 이런 이야기가 “비밀스럽게 결혼의 억압적인 특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여성에게 결혼은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의무를 지되, 깃털옷으로 상징되는 자유를 대가로 하는 제도인 셈이다.[3]

평소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엠마 왓슨은 《미녀와 야수》에서 주체적인 벨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 노력에는 야수와 천천히 사랑에 빠지는 모습이라든가,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야수와 날을 세우며 싸우는 모습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녀와 야수》 이야기가 기저에 깔고 있는 함의는 분명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멀다. 페미니스트에게 결혼은 자유와 욕망을 포기하는 대가로 부와 남자를 얻는 것이 아니니까.


  1. 왜 벨이 야수의 생김새까지도 사랑했을 거라는 가정은 없는지 모르겠지만.  ↩

  2. 남자 주인공이 암컷 킹콩과 사랑에 빠지는 영화였다면, 흥행이 얼마나 됐을지 조금 궁금해진다.  ↩

  3. 선녀와 나무꾼이 당연히 떠오를 것이다. 흥미로운 건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의 다양한 변주에도 불구하고, 나무꾼이 행복하게 사는 해피엔딩은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남성 독자들에게 경고를 한다는 의미가 꽤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기도 하다.  ↩

Comments Closed

이제는 조금 식상한 주례사 중에 그런 말이 있다.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까?” 신랑과 신부는 그렇게 하겠다고 서약한다. 하지만 신랑과 신부를 죽음이 갈라놓고 나서는 어떨까? 조금 억지를 더해서 저 질문을 뒤집으면, 죽음이 갈라놓고 나면 함께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어쩐지 발칙한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이기적인지라, 상대가 나의 죽음과 상관없이 영원히 나를 사랑해주길 원한다. 그건 어쩐지 잔인한 이기심이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다. 애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현재의 살아있는 나는 죽은 후의 나를 상상하지 못하고, 그냥 애인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상상에만 화가 났다. 하지만 머리를 조금만 차갑게 하고 생각해보면, 서로가 가장 행복한 방법은 둘 중 하나가 죽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삶을, 그리고 또다른 사랑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과거의 사랑이 한 사람만을 영원히 그리워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면, 현대의 사랑에선 나 이후의 새로운 사랑을 이해하고 권할 수 있는 것이 미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뉴욕 타임스 《Modern Love》에 올라온 이 글은 현대의 사랑이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글이 아닐까 싶다. 대단히 가슴 아프고, 아름다운, 감동적인 이야기다. 전문을 번역했다. 에이미 크루즈 로젠탈(Amy Krouse Rosenthal)이 썼다.

Read More »

Comments Closed

일본 도쿄의 하라주쿠는 패션의 거리로 유명하다. 귀엽다는 뜻의 “카와이”, 서양의 패션 요소와 전통적인 일본 의상의 요소를 믹스한 “와모노”, 로리타와 고딕이 만난 “로리고스”, 미래지향적인 “사이버펑크”, 핀이나 리본 같은 악세사리를 많이 장식하는 “데코라” 같은 패션은 하라주쿠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런 하라주쿠의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길거리 패션은 사라지고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링크한 글에서 주목하는 원인은 경기 침체와 유니클로다. 1998년 이후, 소비자들의 소득이 줄어듬과 동시에 유니클로가 크게 성장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본의 소비자들은 전통적으로 다른 나라의 소비자들에 비해 패션에 쓰는 돈이 좀 더 많은 편이었지만, 일본의 임금 수준은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일본인들이 패션에 쓰는 돈은 19퍼센트 줄어들었다(PDF). 요컨대, 개성을 표현하는 데 쓸 수 있는 돈이 적어지면서, 요즘의 하라주쿠에선 다양한 개성 대신 단순하고 무난한 스타일의 유니클로를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분석은 다소 피상적이고, 직관적이다. 하라주쿠에서 길거리 패션이 사라져 가는 현상을 두고, 인스타그램과 트위터 덕분에 개성을 뽐내기 위해 굳이 하라주쿠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심심한 분석이겠지만, 그냥 시대의 유행이 변했다는 이유를 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글을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얼마 전 읽었던 다른 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글의 제목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가성비를 따진다[1]였다. 소비의 선택지에 “실패”라는 옵션이 있어야, 취향을 시험하고, 시야를 넓힐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단순히 개인의 삶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소비가 위축될 때면, 동시에 사회의 취향 또한 납작해진다는 얘기는 꼭 하라주쿠의 모습을 말하는 것 같다. 모두가 팍팍해진 사회의 취향은, 엄밀히 말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일뿐, 취향이 아니다. 나는 취향이란, 어떤 것을 선택하지 않느냐에 관한 것이지,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못하는 사회엔 납작한 취향조차도 없다.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쩌면 오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이런저런 곁눈질과 시행착오 끝에 가까스로 얻게 된 한 줌의 취향. 안도할 만한 기준을 얻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던지. 상품 사이를 산책할 때 나는 엄격한 동시에 부드러운 사람이 됐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는 데서 오는 여유. 그러나 원하지 않는 것 역시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식의 까다로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의심을 버리자 쇼핑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고 원하는 게 많아졌다. 변화는 단순했다. 과거, 장식이나 색상 위주로 물건을 골랐다면 이제는 질감이나 선(線)을 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선, 흔히 ‘잘 빠졌다’고 말하는 상품의 전체적인 맵시를. 좋은 옷을 입는 건 그것의 가격이나 옷감뿐 아니라 좋은 실루엣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는 걸 깨달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명품은 아니어도 상품(上品)을 알아보는 눈이 생겼다 할까.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상점 앞 스테인리스 기둥에 내 모습을 비춰봤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정장. 백화점 할인매장에서 산 너무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핸드백. 담담한 질감의 소가죽 구두. 4월, 친하지 않은 친구의 결혼식에 가는 길. 책가방에 점수가 잘 나온 성적표를 담아 집으로 뛰어가는 아이처럼 나는 히죽 웃었다.

소비에 실패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선택할 수 있는 취향도 없다. 현대 사회에서 취향이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소비에 실패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자신을 나타내기가 그만큼 힘들어진다. 우리는 모두 이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기에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1. 사족이지만, 난 이 글의 제목이 내용을 제대로 함축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

Comments Closed

내가 아이즈에 쓴 글이다. 케이시 애플렉의 과거 성폭력 혐의에 대해 썼지만, 이 문제 때문에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물론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고, 보지 않겠다는 것 또한 존중 받을만한 선택이다. 다만, 그럼에도 콘스탄스 우가 지적했듯, 아카데미가 케이시 애플렉에게 남우주연상을 주는 것은 반대하게 된다. 남우주연상이라는 것이 단순히 연기를 가장 잘한 남성 배우에게 주는 상이라기보다는, 인간 경험의 존엄을 탐구하고 그걸 관객들에게 훌륭하게 보여준 이에게 수여하는 영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케이시 애플렉은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

Comments Closed

여성혐오자들이 성공한 여성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없다. 반박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 이 대답은 링크한 글의 주인공, 에밀리 템플-우드의 생각이다. 작년, 올해의 위키피디안 상을 공동 수상하고, 현재는 의대에 재학 중인 템플-우드는 위키피디아에서 약 57,600건의 문서를 편집했다. 인터넷에서 이름을 알린 템플-우드를 여성혐오자들이 가만둘리 없다. 그녀의 메일함에는 그녀를 강간하겠다고 협박하는 메시지가 도착했고, 위키피디아의 사용자 페이지는 그녀를 비방하는 글들로 훼손됐다. 안타깝지만,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에게 이런 일은 흔하다.

자신을 향한 욕설과 비방이 계속되면, 많은 이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침묵하고 정신 건강을 챙기거나, 이들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목소리를 낸다. 욕설과 비방이 심해질수록 후자의 선택을 하기란 점점 더 힘들어진다. 하지만 이 글의 필자가 지적하듯, 전자의 선택을 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인터넷은 점점 더 지루한 공간이 되어 버린다. 누군가가 침묵할 것을 강요당하고, 웹을 떠나버리면, 그들의 목소리는 인터넷이라는 광장에서 사라지고 만다. 인터넷을 지배하는 아이디어와 밈은 점점 더 침묵당하지 않는 사람들, 즉 남성들의 취향과 관점에 맞게 치우쳐진다. 결국 웹은 지루해질 뿐만 아니라, 가치를 잃게 된다.

나무위키를 예로 들어보자. 나무위키에서 볼 수 있는 주도적인 관점은 대개 남성중심적이다. 최근의 이퀄리즘 사건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무위키의 문서 상당수가 편향된 정보를 담고 있다는 건 이미 상식이다. 나무위키만 탓할 것도 아니다.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의 상당수가 그렇다. 누군가는 메갈리아를 예로 들며 편향된 건 똑같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메갈리아가 지난 한 달 간 채 10개의 새 글이 올라오지 않은, 침묵당한 커뮤니티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위키피디아의 경우 편집자의 약 90 퍼센트가 남성이고, 532만 건의 문서가 남성의 성취와 관심사에 치중되어 있다. 예를 들면, 닌자 거북이에 관한 문서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에 관한 문서보다 두 배나 길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할 거라고 생각되는 위키피디아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남성 위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링크한 글의 주인공 에밀리 템플-우드에게 박수를 보내게 된다. 템플-우드는 위키피디아의 편집자로, 여성혐오자들이 자신에게 욕을 할때마다 침묵하는 대신, 자신의 분노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풀어냈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에게 강간, 살해 협박을 하고, 누드 사진을 보내달라고 할 때마다, 이전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주목할만한 여성 과학자들의 위키피디아 페이지를 만든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을 침묵시키려 했던 익명의 멍청이들에게 보내는 최고의 “fuck you”라고 생각했다.

템플-우드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녀도 처음엔 욕을 먹을 때마다 상대방을 같이 욕했고, 때론 상처를 받아서 울음을 터뜨린 적도 많았다. 하지만 분노라는 것은 불과 같아서 사람을 잡아먹는다. 분노는 분노로서 소비될 때보다, 생산적인 일을 위한 동력으로 쓰일 때 가장 가치가 있다. 템플-우드는 그걸 잘 알았던 셈이다. 그녀는 자신의 분노를 《여성 과학자들을 위한 위키프로젝트》의 동력으로 삼았고, 현재 그 프로젝트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아티스트》, 《LGBT 관련 콘텐츠》 같은 에디터톤과 함께 위키피디아의 다양성을 증진시키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지루한 웹 대신에 좀 더 흥미롭고 재밌는 웹을 보게 됐다. 이쯤되면 최고의 fuck you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