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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성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 누구도 그럴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이 나고 자란 사회의 도움을 받는다. 사회가 제공하는 공적 자산의 도움을 받고, 경제 활동을 하면서 사람 사이의 인간 관계에서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런 부분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잊혀지기 쉬운 부분이라 쉽게 상기하기 어렵다.

나도 그런 도움을 받으며 자랐다. 운 좋게 자상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고, 운 좋게 그리 나쁘지 않은 나라에서 태어나 운 좋게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직업을 가지고 일 할 수 있게 된 것도 온전히 내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이런 행운에 대해 상기해본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받은 이런 행운을 다시 다른 이에게 되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딘가에 기부를 할 수도 있고,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른 종류의 노력을 할 수도 있다. 자신의 운을 “Pay It Forward” 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생각을 잘 정리한 글이 The Atlantic에 올라와서 전문을 번역했다. Robert H. Frank가 쓴 글이다.


나는 운이 따르는 사람이다. 아마도 상당한 내 행운의 가장 극적인 예는 2007년 이사카에서의 추운 아침에 있었던 일일 것이다. 나는 그 때, 내 오랜 친구이자 조력자인 코넬의 심리학자 Tom Gilovich와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그는 후일, 내가 두번째 세트에서 어지러움을 호소했다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가 알게 된 것은, 내가 코트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누군가에게 911을 부르라고 소리치고, 내 가슴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 그가 영화에서 여러 번 봤던 것이지만, 훈련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는 내가 기침을 토해내게 했지만, 몇 초가 지나자, 나는 아무런 맥박 없이 다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구급차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사카의 구급차는 5마일(옮긴이: 약 8 km) 이상 떨어진 도시의 반대편에서 급파됐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도착한 걸까? 우연히도, 내가 쓰러지기 전에 테니스 센터와 가까운 곳에서 발생한 두 건의 교통 사고 때문에 구급차 두 대가 급파됐었다. 그 두 건의 교통 사고 중 하나는 심각한 부상이 발생하지 않았고, 두 대 중 하나의 구급차가 몇 백 야드 떨어져 있었던 내게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응급구조사는 내게 제세동기를 사용했고, 빠르게 지역 병원으로 나를 옮겼다. 거기서 나는 헬리콥터로 옮겨져 펜실베니아의 큰 병원으로 이송될 수 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수술을 하느라] 저체온 상태로 밤을 보냈다.

의사는 나중에 내가 갑작스러운 심정지를 겪었다고 말했다.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의 거의 90 퍼센트는 살아남지 못하고, 살아남은 몇 안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심각한 장애를 겪게 된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 3일 간, 가족들이 내게 말하길, 내가 뜻모를 말들을 지껄였다고 한다. 하지만 4일째 되는 날,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병원에서 퇴원했고, 2주가 지난 후엔, Tom과 다시 테니스를 쳤다.

만약 구급차가 근처에 없었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우연한 사건들이 좋은 결과를 내는 건 아니다. Mike Edwards는 행운의 여신이 그를 외면했기 때문에 더이상 살 수 없었다. 브리티쉬 팝 밴드,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주자였던 Edwards는 2010년 잉글랜드의 시골 도로를 따라 운전하고 있었다. 그 때, 1,300 파운드의 건초 더미가 가파른 언덕을 따라 굴러 내려와 그의 밴과 그를 덮쳤다. 어떤 얘길 들어봐도, 그는 예의 바른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명을 앗아간 건초 더미는 순전히 악운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고, Edwards는 운이 나빠서 죽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여타의 경우, 무작위적인 운은 좀 더 미묘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우리로 하여금 운이 따랐다는 설명에 반박하게 만든다. 특히 상당한 수준의 운에 의해 개인적인 성공이 좌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불편해 한다. E. B. White가 한 때 썼듯이, “운은 자수성가한 사람의 앞에서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죽음에서 운좋게 벗어난 게 나를 행운의 권위자로 만들어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에 비해서 나를 행운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만들어주기는 했다. 나는 그 배움의 과정에서 운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닫고 있는 것보다 삶의 성과에 있어 훨씬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은 행운에 감사하지 않을 가능성이 특히 높다. 퓨 리서치 센터에 따르면, 저소득 계층에 비해서 고소득 계층은 개인이 부자가 된 건 본질적으로 그들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다른 설문조사도 이 사실을 실증한다: 부자들은 자신의 성공이 운이나, 적시적지에 있었다는 것 같은 요인 때문이라기보다는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라고 압도적으로 더 많이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점점 더 많은 증거들이 우리가 자수성가했다고 — 재능이 있다거나, 열심히 일했다거나, 운이 좋다거나 하는 것보다 — 스스로를 보는 경우, 우리를 인색하고 공공 의식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만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건 심지어 우리의 성공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높은 수준의 공공 인프라나 교육 같은) 환경이 운이 아닌 것처럼 만든다.

하지만 다행히도 사람들은 행운에 관해 생각해보게 될 때면, 공공선에 기꺼이 더 많은 기여를 하려 한다.

심리학자들은 어떤 일이 발생한 후, 그 사건이 예측 가능하지 않았음에도 예측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설명할 때, 사후 편향(hindsight bias)이라는 단어를 쓴다. 이 편향은 대단히 큰 성과를 거뒀을 때 특정한 힘과 함께 작동한다.

Michael Lewis는 2012년, 프린스턴 대학교의 졸업생들에게 한 연설에서 자신을 유명한 작가로 만들어준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을 얘기했다 — 그는 이미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점과 프린스턴에서의 교육 받았다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어느 밤인가 저는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습니다. 거기서 저는 커다란 월 스트리트 투자 은행인 살로몬 브라더스에 있는 거물의 와이프 옆에 앉았죠. 그녀는 거기서 사실상 자신의 남편에게 저를 채용하라고 했어요. 저는 살로몬 브라더스에 대한 아는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살로몬 브라더스는 월 스트리트가 재탄생되는 그 곳에 바로 있었죠 —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고, 사랑하는 그 월스트리트 말입니다. 저는 거의 자유재량에 의해 그 곳에서 커져가는 광기를 관찰하기 가장 좋은 자리에 배정받았습니다: 그들은 저를 주택 파생상품 전문가로 바꿔놨죠.

살로몬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Lewis는 1989년 그의 베스트 셀러, 《라이어스 포커》를 썼다. 그는 그 책에서 월 스트리트의 금융 수완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놨는지를 설명했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제가 타고난 작가라고 얘기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죠. 심지어 저조차도 좀 더 사실에 가까운, 운을 테마로 한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살로몬 브라더스 거물의 아내 옆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그 시대의 이야기를 쓰기에 가장 좋은 월스트리트 회사에 들어갈 가능성은요? 업계에 대해 관측하기 가장 좋은 자리에 배치될 가능성은 어떨까요? … 이건 그냥 거짓된 겸손이 아닙니다. 핵심을 담고 있는 거짓된 겸손이죠. 제 사례는 성공이 언제나 합리화된다는 걸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성공이 운에 의해 설명되는 걸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 특히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성공을 하면, 사람들은 그들의 성공이 어쨌든 당연한 일이었다고 느낍니다.

인간의 인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왜 우리가 성공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지에 관해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자기발견적 학습을 통한 이용 가능성 말이다. 우리는 인식의 지름길을 이용해서, 얼마나 쉽사리 비슷한 사례를 회상할 수 있는지에 기초해 사건이나 결과의 가능성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성공적인 경력은 노력, 재능, 운을 포함한 많은 요인들로부터 나온다. 이 요인들 중 일부는 자주 되풀이되고, 다시 회상하기 쉽다. 하지만 다른 요인들은 드물게 되풀이 되고, 따라서 우리가 삶의 이야기를 구성할 때면 이 요인들을 간략하게 다룬다.

선진국에서 재능을 가진 이가 열심히 노력해서 부자가 됐을 때, 그들이 자신의 성공을 다른 무엇보다 재능과 노력 덕분이라고 말하는 건 전혀 놀랍지 않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고, 얼마나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대단히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수년 간 매일 열심히 일했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왔다! 관념적으로는 그들도 아마 그들이 다른 환경에 처해 있었다면 잘 해내지 못했을 거라는 걸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경험하는 매일은 전쟁으로 파괴된 짐바브웨 같은 곳에서 태어나지 않은게 얼마나 행운인지 거의 상기시켜 주지 않는다.

우리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두번째 방식으로도 편향되어 있다: 우리에게 불이익을 준 사건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보다 더 떠올리기가 쉽다. 내 친구 Tom Gilovich는 이 비대칭을 설명하기 위해 역풍과 순풍을 비유로 들었다.

우리가 역풍을 맞으며 뛰거나 자전거를 타면, 바람을 아주 잘 인지하게 된다. 당신은 코스를 돌아 바람이 등을 밀어줄 때까진 그저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일단 그렇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그 사실을 빠르게 잊어버린다 — 그냥 등 뒤의 바람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건 우리의 마음이, 그리고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를 도와주는 것보다는 우리를 방해하는 것을 더 잘 인식한다.

우리가 성공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 게 우리가 거기에 자랑스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자부심은 강력한 동기다; 게다가 운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은 뒤집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운을 덜 생각하기 때문에] 역경을 버틸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운을 북돋아준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의 역할을 숙고하지 못하는 건 단점 또한 갖고 있다. 운 좋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운을 얘기할 가능성을 낮춘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개인적인 행운은 고도의 선진국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네팔의 Peace Corps 자원봉사자로 있을 때, 내 요리사였던 부탄 남자 Birkhaman Rai를 종종 떠올린다. 그는 아마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비록 읽는 법을 배우진 못했지만, 자신의 환경 속에서 높은 기준에 맞춰 지붕을 이는 일에서부터 시계를 고치는 일, 상인을 섭섭하게 하지 않으면서 물건의 값을 깎는 일까지, 사실상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에게 줄 수 있었던 적은 봉급이 그가 살면서 가장 많이 받은 봉급이었다. 그가 만약 부유한 나라에서 자랐다면, 더 형편이 좋았을 것이고, 어쩌면 대단히 크게 성공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엄청난 운이 따라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환경을 유지하는 것은 인프라부터 교육까지 거의 모든 것에 높은 수준의 공적 투자가 필요한 일이다 — 최근 미국인들이 지원하려 하지 않는 것들이다. 많은 요인들이 이런 문제의 원인인지만, 그 중 하나는 유난히 두드러진다: 장기적인 미국의 최고 한계 세율 하락으로 인한 예산 부족 말이다.

정치과학자 Benjamin Page, Larry Bartels, Jason Seawright에 의한 최근의 연구는 미국에서 상위 1퍼센트의 부자들이 “정치적으로 대단히 적극적”이며, 나머지 미국 대중들보다 과세, 규제, 정부 지출에 반대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미국에서 가장 부자인 이들이 자신들의 성공이 다른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 덕분이라고 믿는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게 놀라운 일일까? 성공에서 운의 역할을 간과하는 것과 소득의 상당 부분을 가지고 있을 권리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확실히 그 거리가 멀지 않다 — 당신을 성공하게 해준 공적 투자를 지속해야 한다는 걸 꺼려하는 것도 거리가 멀지 않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태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최근의 연구는 운을 인지하는 것이 관용을 촉진한다고 말한다. 내 이전 연구 보조였던 Yuezhou Huo의 실험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녀는 피험자에게 설문조사에서 최근 일어난 좋은 일들을 써내는 대가로 현금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실험을 계획했다. 그녀는 첫번째 참여 그룹에겐 사건에 기여한 요인 중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요인을 쓰게 했고, 두번째 그룹에겐 사건에 기여한 개인적인 소양이나 행동을 쓰게 했다. 그리고 대조군에겐 그냥 왜 좋은 일이 생겼는지를 설명하게 했다. 설문을 끝낸 후, 피험자들은 자신들의 보상을 자선단체에게 일부 혹은 전부를 기부하는 기회를 부여 받았다. 좋은 일이 외적인 요인들 덕분에 생겼다고 쓰도록 한 그룹은 — 많은 이들이 운을 비롯해, 자신을 도와준 배우자, 사려깊은 교사, 경제적인 도움을 언급했다 — 개인적인 소양이나 선택 때문에 좋은 일이 생겼다고 쓰도록 한 그룹에 비해서 25 퍼센트나 더 많이 기부했다. 대조군의 기부는 대략적으로 나머지 두 그룹의 중간 정도였다.

노스이스턴 대학의 심리학자인 David DeSteno의 실험은 감사하는 마음이 공공선을 기꺼이 지지하게 만든다는 추가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널리 인용된 한 연구에서 그와 그의 공동 저자는 실험실의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게 하고, 그들이 타인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의 지출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영리한 실험 방법을 고안했다. 감사하는 마음이 불러일으켜진 피험자들은 대조군에 비해 낯선 사람들에게 25 퍼센트나 관용을 더 많이 베풀었다. 이 관찰은 학계의 다른 심리학자들이 한 실험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났다. 이 모든 걸 종합해서 보면, 이 연구는 우리가 운의 중요성을 상기할 때, 공공선으로 우리의 행운을 다시 재투자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는 뜻밖에 심지어 운이 우리의 행운을 늘려 줄 수도 있다는 것까지 인지하게 된다. 사회 과학자들은 거의 20년 동안 감사하는 마음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이 신체적, 심리학적, 사회적 변화의 주목할만한 배열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아냈다. 데이비스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Robert Emmons와 마이애미 대학교의 Michael McCullough는 이러한 노력을 가장 많이 한 기여자들이다. 그들은 공동 연구 중 하나에서, 첫번째 그룹의 사람들에겐 그들을 감사하게 만드는 것들을 일기에 쓰라고 했고, 두번째 그룹의 사람들에겐 그들을 화나게 하는 일에 대해 쓰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세번째 그룹에겐 그냥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라고 했다. 10주 후, 연구자들은 감사하는 마음에 관해 적은 이들에게서 극적인 변화가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새롭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 이들은 덜 자주 아팠고, 고통을 덜 느꼈으며, 수면의 질이 향상됐다. 그들은 더 큰 행복감과 기민함을 보고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더 친화적이고, 더 동정심이 많아졌다고 말했고, 덜 외롭고, 덜 고립된 것처럼 느낀다고 말했다. 두번째나 세번째 그룹에선 비슷한 변화가 관찰되지 않았다. 다른 심리학자들은 불안감과 공격적인 충동의 감소 같은 추가적인 감사의 장점을 증거로 제공했다.

경제학자들은 결핍에 대해 얘기하길 좋아하지만, 그들의 논리가 인간의 감정 영역에서도 언제나 유효한 건 아니다. 무엇보다 감사하는 마음은 우리가 파산할 거라는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통화다. 실제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다른 이들과 운의 경험에 관해서 말해 본다면, 약간의 대화만으로도, 그 주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조차 기꺼이 운을 상기하며 자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쉽게 잘 퍼질거라는 걸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대화들은 거의 항상 참여자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