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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제벨에 올라온 Aimée Lutkin의 글이다. 우리의 문화는 싱글의 삶에 우호적이지 않다. 싱글은 언젠가는 끝날 일시적인 상태로 생각되지, 영원할 거라고 잘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글에서 지적하듯, 사랑이나 싱글이나 상태가 지속될 가능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면, 싱글도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 게다가 실제로 싱글의 수가 커플의 수보다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싱글을 대하는 우리의 문화가 변해야 하는게 아닐까? 전문을 번역했다.


올해 초, 나는 친구의 집에서 열린 저녁 파티에 참석했다. 집주인들과 손님들은 느릿하게 부엌에 모였다. 우리는 음식이 준비될 때까지 캐비넷을 열고 닫으며, 선반에서 테이블로 접시를 옮기고, 맥주와 안주를 날랐다. 기분 좋은 저녁이었고, 파티가 끝나갈 때 쯤엔 배도 부르고, 약간은 취하기도 했다. 친구가 내게 질문을 던진 건 그 때였다. “그래서 요즘엔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거야? 누구 만나는 사람은 있어?”

특별할 것 없는 질문이었고, 기억될만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는 그 때 너무 많은 가정식을 먹은 후였고, 그래서인지 약간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였다. 게다가 맥주도 마셨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누군가랑 다시 데이트를 하게 될지 잘 모르겠어.”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 친구는 자신의 머리를 저으면서 눈을 굴렸다. 바로 내 주위의 모두가, 내가 남은 삶을 홀로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들은 내가 틴더라는 것을 들어봤는지 물어봤다. 그럼 OK큐피드는 들어봤냐고도 물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만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이, 그 생각을 하는 바로 그 때 누군가를 만난다고 말했다. 가장 기대하지 않을 때, 사랑이 온다면서 말이다. 자신들을 보라고.

그래서 나는 그들을 쳐다봤다. 테이블에 있는 모두가 연인이 있었다. 모두가 누구도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됐던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며, 내가 단지 과거의 그들과 같다고 확신했다. “그 순간” 이전이라면서. 곧,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더 이른 시기에 나는 “그 순간” 이후의 삶을 살게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나의 특별한 누군가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잠깐동안, 아니라고, 아마 그렇지 않을 거라고 얘기하려 했지만, 결국 다시 한번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부끄럽게도 눈물이 고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맞아, 나도 알아”라고 말하고 말았다.

내가 섹스를 한 지는 거의 3년이 지났고, 진지한 연애를 했던 건 6년이 넘었다. 연애는 지속되는 동안은 즐거웠지만, 이제는 모든 게 끝나버린 느낌이 든다. 나는 내가 싱글인 이유를 아는게 과연 중요한지도 잘 모르겠고, 싱글이고 커플이고 무지하게 애쓰는 양다리들이고 누가 가장 신세가 좋은지에 대한 영원한 논쟁 따위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고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누구나 혼자라고 느낄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이 친밀감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역대 처음으로, 미국에서 싱글 성인 여성의 수가 기혼 성인 여성의 수를 넘어섰지만, 우리의 경험을 둘러싼 내러티브는 그러한 숫자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일단 과거의 낭만적인 썸에서 장기간의 싱글 기간으로 넘어가고 나면, 견디기 힘든 건 외로움이 아니다. 나는 혼자 있는 걸 제법 잘 하는 편이기도 하다. 나는 내 친구들과 즐겁게 노는 법을 배웠고, 그게 즐겁지 않을 때조차도 놀거리들은 차고 넘친다.

힘든 건, 내가 내 삶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설명할 언어가 없어서, 내 상황을 말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당신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당신이 “포기했다”고 말하는 걸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기묘한 싱글의 감옥을 표현하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이건 비록 언제고 끝날수 있음에도, 무한히 계속될 것만 같다. 나는 오래도록 나와 내 로맨스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하는 걸 허락받지 못했다. 그건 내 삶을 훨씬 더 힘겹게 만들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내가 절반쯤 자발적인 싱글이 된지 몇 년이 됐을 때, 내겐 여러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는 친구가 몇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정말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지만, 각각의 관계 사이에 거의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헤어지고 나면 즉각적으로 고통스럽다고 느낀다. 하지만 적어도 그 감정엔 그걸 표현할 단어가 있다: 가슴이 미어진다(heartbreak)는 표현이다. 하지만 내겐 다년간에 걸쳐서 천천히 육체적, 감정적 친밀감과 유리되며 느끼는 흐릿한 고통을 표현할 단어가 없다. 지금 시점에서 싱글이 됐다며 술을 마시고 바닥을 긁는 건 웃기는 일일 것이다. 또한 연인과 방금 막 헤어진 누군가에게 “이런 얘긴 지겹게 들었지, 내가 화제를 돌리기 전까진 계속 듣게 될거야.”라고 말하는 건 잔인하고 몰상식한 일이다. 하지만 화가 나거나 씁쓸함이 몰려올 때면 그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사랑과 연애는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시간의 지표이기도 하다. “영원하다”는 단어는 대개 사랑의 앞에 붙는다. 비록 사랑이라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싱글인 것과 마찬가지로 깨지기 쉬운 상태지만 말이다. 앞날을 내다볼 때, 만약 내가 지금 타고 있는 삶의 열차를 타고 종점까지 간다고 하면, 내 미래엔 나의 인간 존재를 확인시켜줄만한 커다란 이벤트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내 가장 친한 친구가 결혼을 했을 때, 그녀는 다음날 하루종일 울었다고 내게 말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의 넘치는 애정에 압도되었다면서 말이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있었지만, 몇 년이 지나고, 여전히 싱글인 나는, 그와 비슷하게 내 삶이나 나의 친구, 가족과의 관계를 인지할만한 이벤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죽는다면 장례식에서 그럴 수 있겠지만, 아마 그게 나한테 즐거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약속의 지표나 아이 없이, 내 존재를 단단히 고정시키는 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고, 때때론 내 스스로가 그걸 포기하고, 우울한 어둠 속으로 표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결혼과 이별은 모두 사랑의 여정 속에서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순간이고, 그 둘은 모두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사랑이 끝나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바보같은 일들이 몇 가지 있다. TV를 보면서 아이스크림을 퍼먹을 수 있고, 친구들 사이에 기대서 감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혹은 술에 취한 채 잘못된 사람에게 키스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키스가 끝나면, 당신은 그저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거기엔 감정적인 고저가 없다. 그건 당신의 삶이고, 사람들을 혼동스럽고 우울하게 만드는 삶이다. 나는 내가 평생 혼자 살거라고 친구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이 황량한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내가 그러지 않길 바란다. 그들은 내 “문제”에 대한 답이 갖는 근저의 맥락을 인정하지 않은 채 내게 조언을 하고자 한다.

그런 진부한 해결책의 기저에 깔린 메시지는 내가 그냥 소망을 갖고 바라면서 계속 기다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삶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사랑은 보장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지 않은가?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보기에 쿨하고, 꽤나 매력적이고, 적어도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사랑은 보장되어 있지 않다. 나는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울고만 싶어졌다. 왜냐하면 내가 누군가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는 소극을 계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잠자코 멈춰서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건 내가 주도하는 삶을 지워버리는 일이였다. 나는 결코 영원히 혼자일 거라고 자유롭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진정한 인생이 시작되기 전까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