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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여자를 말하다

《에스콰이어》 2018년 2월호에 기고한 글이다.


2018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훌루의 드라마 <시녀 이야기>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엘리자베스 모스는 수상 소감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소설 <시녀 이야기>의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입니다: ‘우리(여성들)는 신문에 이름이 오르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신문의 가장자리에 있는 하얀 빈 공간에서 살았습니다. 그건 우리를 더 자유롭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빈틈 속에 살았습니다.’ 이 상은 이 세상에서 평등과 자유를 위해 싸우고 불의에 맞설 만큼 용감한 마거릿 애트우드 당신과 당신 이전, 이후의 모든 여성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더이상 신문 가장자리의 하얀 빈 공간에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빈틈 속에 살지 않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신문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드라마의 원작 소설 <시녀 이야기>가 여성을 오직 임신과 출산의 도구로만 보는 가상의 디스토피아를 그렸다는 점, 그리고 시기적으로 할리우드의 성폭력 문제가 중요한 이슈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가슴을 벅차게 하는 감동적인 수상소감이라 할만하다. 엘리자베스 모스가 얘기했듯, 과거와 달리 여성들은 이제 스스로 이야기를 쓰고,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된다. 2017년 북미 박스오피스 성적 1,2,3위는 각각 <스타 워즈: 라스트 제다이>, <미녀와 야수>, <원더 우먼>이었고, 세 작품 모두 여성이 주인공을 맡은 영화들이었다. 지난 37년간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이렇듯 신문 기사, 드라마, 영화, 소설 등 많은 미디어에서 여성들은 이제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여성들이 쓰는 이야기에 관해, 그중에서도 소설에 관해 얘기하고자 한다.

아무래도 영어로 쓰인 소설이다 보니 한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해 영미권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던 단편 소설이 있다. 뉴요커에 올라온 <캣 퍼슨>이라는 소설이다. 2017년 뉴요커에서 두 번째로 많이 읽혔고, 크리스틴 루피니언이라는 신예 작가가 썼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마고라는 20대 여자 주인공이 로버트라는 30대 남성과 만나는 이야기다. 마고는 자신이 일하는 영화관에서 로버트를 만난다. 이 둘은 문자를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첫 데이트를 한다. 하지만 데이트는 생각보다 로맨틱하지 않았다. “허세로 가득한 홀로코스트 영화”를 봐야 했고, 데이트 중엔 “혀를 목구멍까지 밀어 넣는” 끔찍하고 나쁜 키스를 했다. 이어진 섹스는 더 최악이었다. 로버트는 섹스 도중 마고에게 섹스가 처음인지 물었고, 발기도 유지하지 못하면서, “토끼처럼 부르르 떨다 사정”했다. 데이트부터 섹스까지 마고는 계속해서 로버트가 어떤 사람인지 걱정하고, 자신의 선택을 의심한다. 남자가 옷을 벗는 모습을 보며 섹스를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섹스를 거절하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두려워 싫다고 얘기하지 못한다. 얼핏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줄거리지만, 이 소설은 여성들의 엄청난 공감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복스는 20대 여성들이 한 번쯤은 느껴봤을 법한 것들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인기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사실은 잘 알지 못하는 남성과 데이트를 할 때 여성이 느끼는 불안감,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상대에게 친절하게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은 20대 여성들이 데이트할 때면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다. 마고는 로버트와 관계를 이어가면서도, 이 남자가 자신을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 강간하려는 것이 아닌가 상상하고, 남자의 집에 가서도 남자가 사실은 자신을 속여서 죽이려 하는 살인마가 아닌지 상상한다. 남자들은 여자와 데이트를 할 때 그런 상상을 하지 않는다. 크리스틴 루피니언이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인용한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처럼 “남자들은 여자가 자신을 비웃는 것을 걱정하지만, 여자들은 남자가 자신을 죽일까봐 걱정한다”. 그동안 여성의 정체를 모호하게 묘사하며 신비스러움을 강조하는 소설들은 많았지만, 남성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여성들의 두려움을 묘사한 소설은 많지 않았다. 루피니언은 의도적으로 남성이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묘사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부분을 강조했다.

여성들이 “가장자리의 하얀 빈 공간”에서 이야기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여성인 작가가 비슷한 일을 직접 경험하고 느꼈기 때문이다. 루피니언은 온라인에서 알게 된 남자와 만났던 불쾌한 경험에서 <캣 퍼슨>의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저는 그 사람이 저를 대하는 방식에 충격을 받았고, 즉각적으로 제가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 남자가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소설 자체는 가상의 이야기지만, 작가의 경험들은 소설의 소중한 소재가 된다. 페미니즘 열풍과 함께 베스트셀러에 오른 한국 소설 <82년생 김지영> 또한 조남주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픽션으로 만든 이야기다. 조남주 작가는 “평범한 여성은 이렇게 살고 이런 고민을 한다는 걸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고 말한다. 같은 작가의 단편 소설인 <현남 오빠에게> 또한 주변의 여성이 한 번쯤은 해봤을 법한 나쁜 연애의 기억에 관해 쓴 편지 형식의 소설이다. 이런 소설은 남성 작가들이 쓰기 어렵다. 남성들은 여성들과 같은 세계를 살면서도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설이 꼭 작가의 경험을 소재로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한계는 어쩔 수 없이 소설에서 드러나고 만다. 뉴요커의 픽션 에디터 드보라 트라이스만은 <캣 퍼슨>이 “강간이나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그어진 섬세한 선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여성의 입장에서 관계의 섬세함을 문장으로 풀어내기에 여성 작가가 남성 작가보다 더 적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독자들은 여성이 여성의 문제에 관해 쓴 이야기들이 문학적이지 않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캣 퍼슨>의 경우, 소설의 인기만큼 반발도 컸다. 트위터에선 작품을 깎아내리는 반응만 모아놓은 “<캣 퍼슨>에 대한 남자들의 반응”이라는 계정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복스는 우리의 문화가 남성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주목할만하고, 보편적이고, 문학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여성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사소하고, 흥미롭지 않고,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캣 퍼슨>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캣 퍼슨>을 문학으로 보려 하지 않는 반응들이 있었다. 뉴요커라는 언론에 올라왔다는 점을 강조하며, 소설이 아닌 “기사”라고 하거나, “에세이”라고 언급하는 식이었다. 뉴요커의 픽션 섹션에 올라왔고, 3인칭 시점에서 서술됨에도 <캣 퍼슨>을 폄하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작품을 논픽션으로 언급하고자 했다. <캣 퍼슨>을 논픽션으로 얘기하는 것은 이 소설이 갖는 문학적인 장점을 지워버리는 일이다.

<캣 퍼슨>의 인기는 한국에서 <82년생 김지영>이 얻는 인기를 떠올리게 한다. 시기적인 부분이 두 소설의 인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 작가가 둘 다 무명이었다는 점, 여성의 이야기를 써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은 두 소설의 공통점이다. 재밌는 건 반발 또한 비슷하다는 점이다. <캣 퍼슨>을 문학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82년생 김지영> 또한 한편에서 작품이 기존 순문학의 미학적 기준을 충족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한국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82년생 김지영>을 순문학으로 보기보다는 “각종 통계와 자료를 한 인물의 생애에 그대로 대입해 ‘소설 형식을 빌린 르포르타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르포르타주로 분류한다고 해서 <82년생 김지영>이 갖는 주제 의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다시 한 번 “가장 자리의 하얀 빈 공간”으로 쫓겨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다행히 반발과 상관없이, 2018년에도 여성들의 이야기는 계속 될 예정이다. 모든 배우가 여성 배우로 바뀐 <오션스 8>이나,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주연을 맡은 <툼 레이더> 리부트, 에바 두버네이가 감독을 맡고, 리즈 위더스푼, 오프라 윈프리가 출연하는 <시간의 주름> 같은 영화들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캣 퍼슨>을 쓴 크리스틴 루피니언은 이 소설 덕분에 거액의 계약금을 받는 출판 계약을 했다. 그동안 우리는 남자가 주인공인 남자의 이야기를 지겹게 들어왔다. 영화에서 그랬고, 소설에서 그랬고, 현실에서도 그랬다. 시대적인 흐름은 남자의 이야기에 대해 이제는 그쯤이면 충분하다고 얘기한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에 당황하고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언제나 늘 있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주목해야할 것은 반발이 아니라, 여성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의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제서야 우리는 온전히 인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은 인간의 이야기 중 절반만 들어왔던 셈이 아니던가. 우리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빈틈에 숨겨져 왔던 삶을 이제서야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로 즐길 수 있게 됐다. 나는 내가 그 이야기를 듣는 관객석의 가장 앞줄에 앉을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