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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의 하라주쿠는 패션의 거리로 유명하다. 귀엽다는 뜻의 “카와이”, 서양의 패션 요소와 전통적인 일본 의상의 요소를 믹스한 “와모노”, 로리타와 고딕이 만난 “로리고스”, 미래지향적인 “사이버펑크”, 핀이나 리본 같은 악세사리를 많이 장식하는 “데코라” 같은 패션은 하라주쿠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런 하라주쿠의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길거리 패션은 사라지고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링크한 글에서 주목하는 원인은 경기 침체와 유니클로다. 1998년 이후, 소비자들의 소득이 줄어듬과 동시에 유니클로가 크게 성장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본의 소비자들은 전통적으로 다른 나라의 소비자들에 비해 패션에 쓰는 돈이 좀 더 많은 편이었지만, 일본의 임금 수준은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일본인들이 패션에 쓰는 돈은 19퍼센트 줄어들었다(PDF). 요컨대, 개성을 표현하는 데 쓸 수 있는 돈이 적어지면서, 요즘의 하라주쿠에선 다양한 개성 대신 단순하고 무난한 스타일의 유니클로를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분석은 다소 피상적이고, 직관적이다. 하라주쿠에서 길거리 패션이 사라져 가는 현상을 두고, 인스타그램과 트위터 덕분에 개성을 뽐내기 위해 굳이 하라주쿠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심심한 분석이겠지만, 그냥 시대의 유행이 변했다는 이유를 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글을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얼마 전 읽었던 다른 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글의 제목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가성비를 따진다[1]였다. 소비의 선택지에 “실패”라는 옵션이 있어야, 취향을 시험하고, 시야를 넓힐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단순히 개인의 삶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소비가 위축될 때면, 동시에 사회의 취향 또한 납작해진다는 얘기는 꼭 하라주쿠의 모습을 말하는 것 같다. 모두가 팍팍해진 사회의 취향은, 엄밀히 말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일뿐, 취향이 아니다. 나는 취향이란, 어떤 것을 선택하지 않느냐에 관한 것이지,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못하는 사회엔 납작한 취향조차도 없다.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쩌면 오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이런저런 곁눈질과 시행착오 끝에 가까스로 얻게 된 한 줌의 취향. 안도할 만한 기준을 얻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던지. 상품 사이를 산책할 때 나는 엄격한 동시에 부드러운 사람이 됐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는 데서 오는 여유. 그러나 원하지 않는 것 역시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식의 까다로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의심을 버리자 쇼핑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고 원하는 게 많아졌다. 변화는 단순했다. 과거, 장식이나 색상 위주로 물건을 골랐다면 이제는 질감이나 선(線)을 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선, 흔히 ‘잘 빠졌다’고 말하는 상품의 전체적인 맵시를. 좋은 옷을 입는 건 그것의 가격이나 옷감뿐 아니라 좋은 실루엣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는 걸 깨달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명품은 아니어도 상품(上品)을 알아보는 눈이 생겼다 할까.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상점 앞 스테인리스 기둥에 내 모습을 비춰봤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정장. 백화점 할인매장에서 산 너무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핸드백. 담담한 질감의 소가죽 구두. 4월, 친하지 않은 친구의 결혼식에 가는 길. 책가방에 점수가 잘 나온 성적표를 담아 집으로 뛰어가는 아이처럼 나는 히죽 웃었다.

소비에 실패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선택할 수 있는 취향도 없다. 현대 사회에서 취향이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소비에 실패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자신을 나타내기가 그만큼 힘들어진다. 우리는 모두 이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기에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1. 사족이지만, 난 이 글의 제목이 내용을 제대로 함축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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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이즈에 쓴 글이다. 케이시 애플렉의 과거 성폭력 혐의에 대해 썼지만, 이 문제 때문에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물론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고, 보지 않겠다는 것 또한 존중 받을만한 선택이다. 다만, 그럼에도 콘스탄스 우가 지적했듯, 아카데미가 케이시 애플렉에게 남우주연상을 주는 것은 반대하게 된다. 남우주연상이라는 것이 단순히 연기를 가장 잘한 남성 배우에게 주는 상이라기보다는, 인간 경험의 존엄을 탐구하고 그걸 관객들에게 훌륭하게 보여준 이에게 수여하는 영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케이시 애플렉은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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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자들이 성공한 여성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없다. 반박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 이 대답은 링크한 글의 주인공, 에밀리 템플-우드의 생각이다. 작년, 올해의 위키피디안 상을 공동 수상하고, 현재는 의대에 재학 중인 템플-우드는 위키피디아에서 약 57,600건의 문서를 편집했다. 인터넷에서 이름을 알린 템플-우드를 여성혐오자들이 가만둘리 없다. 그녀의 메일함에는 그녀를 강간하겠다고 협박하는 메시지가 도착했고, 위키피디아의 사용자 페이지는 그녀를 비방하는 글들로 훼손됐다. 안타깝지만,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에게 이런 일은 흔하다.

자신을 향한 욕설과 비방이 계속되면, 많은 이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침묵하고 정신 건강을 챙기거나, 이들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목소리를 낸다. 욕설과 비방이 심해질수록 후자의 선택을 하기란 점점 더 힘들어진다. 하지만 이 글의 필자가 지적하듯, 전자의 선택을 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인터넷은 점점 더 지루한 공간이 되어 버린다. 누군가가 침묵할 것을 강요당하고, 웹을 떠나버리면, 그들의 목소리는 인터넷이라는 광장에서 사라지고 만다. 인터넷을 지배하는 아이디어와 밈은 점점 더 침묵당하지 않는 사람들, 즉 남성들의 취향과 관점에 맞게 치우쳐진다. 결국 웹은 지루해질 뿐만 아니라, 가치를 잃게 된다.

나무위키를 예로 들어보자. 나무위키에서 볼 수 있는 주도적인 관점은 대개 남성중심적이다. 최근의 이퀄리즘 사건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무위키의 문서 상당수가 편향된 정보를 담고 있다는 건 이미 상식이다. 나무위키만 탓할 것도 아니다.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의 상당수가 그렇다. 누군가는 메갈리아를 예로 들며 편향된 건 똑같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메갈리아가 지난 한 달 간 채 10개의 새 글이 올라오지 않은, 침묵당한 커뮤니티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위키피디아의 경우 편집자의 약 90 퍼센트가 남성이고, 532만 건의 문서가 남성의 성취와 관심사에 치중되어 있다. 예를 들면, 닌자 거북이에 관한 문서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에 관한 문서보다 두 배나 길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할 거라고 생각되는 위키피디아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남성 위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링크한 글의 주인공 에밀리 템플-우드에게 박수를 보내게 된다. 템플-우드는 위키피디아의 편집자로, 여성혐오자들이 자신에게 욕을 할때마다 침묵하는 대신, 자신의 분노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풀어냈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에게 강간, 살해 협박을 하고, 누드 사진을 보내달라고 할 때마다, 이전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주목할만한 여성 과학자들의 위키피디아 페이지를 만든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을 침묵시키려 했던 익명의 멍청이들에게 보내는 최고의 “fuck you”라고 생각했다.

템플-우드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녀도 처음엔 욕을 먹을 때마다 상대방을 같이 욕했고, 때론 상처를 받아서 울음을 터뜨린 적도 많았다. 하지만 분노라는 것은 불과 같아서 사람을 잡아먹는다. 분노는 분노로서 소비될 때보다, 생산적인 일을 위한 동력으로 쓰일 때 가장 가치가 있다. 템플-우드는 그걸 잘 알았던 셈이다. 그녀는 자신의 분노를 《여성 과학자들을 위한 위키프로젝트》의 동력으로 삼았고, 현재 그 프로젝트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아티스트》, 《LGBT 관련 콘텐츠》 같은 에디터톤과 함께 위키피디아의 다양성을 증진시키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지루한 웹 대신에 좀 더 흥미롭고 재밌는 웹을 보게 됐다. 이쯤되면 최고의 fuck you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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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현의 등신대를 앞세워 브랜드를 광고하던 SKT가 요즘엔 또다른 젊은 여성의 전신 사진을 대리점마다 붙여놓고 광고를 하고 있다. 도대체 통신사와 젊고 아름다운 여성 모델 사이에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SKT는 소비자들에게 그게 먹힌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젊은 여성 모델을 쓰는 것일테다 (SKT가 인지도를 높인 게 자사의 브랜드인지 설현인지는 논외로 하자). 또다른 예로는 LG전자의 신제품 보도 사진이 있다. 신제품을 보라는 건지, 아니면 모델을 보라는 건지 알 수 없는 LG의 보도 사진에는 늘 늘씬한 여성 모델이 등장한다. 그 외에도 금융사의 새로운 상품 소개부터 주류 광고까지, 많은 광고가 섹스를 팔면서 소비자들에게 어필한다.

이렇듯 여태까지 광고에서 섹스를 파는 것은 성공의 방정식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말 섹스가 “아직도” 성공적인 광고 효과를 보장할까? 그렇지 않다. 링크한 가디언의 기사는 이제 섹스가 아닌, 액티비즘이 팔린다고 주장한다. 예로 들만한 것은 많다. 트럼프의 무슬림 밴에서 반사 이익을 얻으려 했던 우버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에 1백만 달러를 기부한 리프트가 있고, 분노한 시민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1만명의 난민을 고용하겠다고 약속한 스타벅스도 있다.

올해 슈퍼볼 광고를 본 사람이라면,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광고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코카 콜라는 《America the Beautiful》이라는 노래를 여러가지 언어로 부르는 광고를 선보였고, 버드와이저는 미국으로 건너와 성공한 이민자인 자사의 창업자 이야기를 광고로 보여줬다. 섹스를 팔아먹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자동차 광고도 이제는 액티비즘을 판다. 아우디는 “딸에게 무슨 말을 해줄 것인가요?”라고 질문하는 훌륭한 광고를 만들었고, 마지막엔 아우디가 성별에 관계 없이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추구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소비자들은 이제 섹스를 파는 브랜드가 아니라, 좋은 일을 한다고 믿는 브랜드를 찾는다.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브랜드를 찾는 것은 그다지 수고스러운 일도 아니다. 어떤 ’운동’을 하기 위해서 내가 희생해야할 필요도 없다. 다른 커피 브랜드 대신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건, 별다른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스타벅스에 가는 것만으로도 난 간접적으로 난민들에게 도움이 됐다는 자기 만족을 얻는다. 기사에 나오는 말처럼, “우리의 액티비즘은 현재 브랜드에 의해서 중개된다”.

물론 기업들의 이런 변화를 순진하게 마냥 반기기만 해서는 안된다. 명심해야 할 것은 이들 브랜드가 액티비즘을 팔아먹는 것은 그것이 소비자들에게 팔리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결코 이 기업들이 근본부터 선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기업들은,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돈을 쓸 때만, 선한 일을 한다. 단적으로 리얼 뷰티 캠페인으로 평범한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웠던 도브의 모회사인 유니레버는,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에 나올 법한 여성들을 광고 모델로 삼는 액스라는 데오드란트 브랜드도 가지고 있다. 어떤 브랜드가 액티비즘을 팔아먹는 동기가 선한 의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브랜드들의 동기를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 나처럼 스타벅스에 가면서 자기만족을 얻는 소비자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 결과물까지 폄하할 필요도 없다. 액티비즘을 브랜드가 팔아먹는다고 해도, 그건 여전히 액티비즘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약간의 거리감과 약간의 적극성을 갖고 브랜드의 광고를 옳은 방향으로 변화시켜가는 것이다. 언젠가 SKT 대리점에서 여성 모델의 사진이 없어지고, LG가 보도 사진을 제대로 찍는 그 날까지.


+) 사족이지만, 나는 광고에서 액티비즘을 팔아먹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올바름이 가장 세련된 형태(aka 광고)로 표현된다는 게 정말 좋다. 정치적 올바름이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쿨한 것으로 소비된다는 건 대단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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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딱”이라는 말이 위험한 이유

1.
지난 100년 동안, 인류의 IQ가 매 10년마다 평균적으로 3씩 늘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정의상 IQ의 평균은 100이 되어야 하니까, IQ 검사를 판매하는 회사들이 주기적으로 기준을 조정해서 그렇지, 점수 산정 기준을 동일하게 유지하면 인류의 IQ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올라갔다. 이를 플린 효과라고 한다[1]. 이 말은 요즘의 평균적인 십대가 1950년대로 가면 IQ 118이 된다는 얘기고, 반대로 1950년대의 평균적인 사람이 현재로 오면 IQ 82가 된다는 얘기다. IQ 82는 평균 범위(IQ 80–120)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똑똑한 사람이 85%는 있다는 얘기로 높은 수치라고 하긴 힘들다.

물론 이 얘기를 1950년대의 사람들이 현재의 사람들보다 덜 똑똑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건 곤란하다. 실제로 이 효과를 발견한 제임스 플린은 IQ의 상승이 일반 지능의 상승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환경적인 요인에 따라 추상적 추론에 해당하는 하위 검사들의 점수를 잘 받는 데 필요한 능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일례를 들면 이런 식이다. 소련의 오지에 살던 러시아 농부에게 IQ 검사용 유사성 질문을 던지면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2].

Q: 늘 눈이 덮인 지역에서는 모든 곰이 흰색입니다. 노바야제믈랴에는 늘 눈이 덮여 있습니다. 그곳의 곰들은 무슨 색깔일까요?
A: 나는 검은 곰만 봤고, 내가 못 본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요.
Q: 하지만 내 말이 무슨 뜻일까요?
A: 사람이 직접 그곳에 가 본 적이 없다면, 말만 갖고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거라오. 만약에 나이가 60이나 80쯤 된 사람이 그곳에서 흰곰을 봤다고 나한테 말해 주면, 그 말은 믿을 테지요.

플린도 지적했듯이, 농부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농부가 경험에서 얻은 이 통찰은 단지 IQ 검사에서 소용이 없을 뿐이다. 현재의 IQ 검사는 추상적, 형식적 추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의 젊은층이 틀딱 — 틀니를 부딪치는 소리를 희화화한 것으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노인층을 이르는 멸칭 —이라고 부르는 일부 몰지각한(이라고 쓰기엔 틀딱은 노인의 대체어처럼 쓰이고 있다) 노인층이 흡사 이 러시아 농부와 같다고 생각한다.

2.
추상적, 형식적 추론은 개인의 경험을 제쳐 두고,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젊은 세대들은 교육과 변화한 문화적인 요인 덕에 이런 방식의 추론에 노인 세대보다 더 익숙하다. 사회 진보를 위해서 이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 글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건, 그보다는 그게 노인 세대를 혐오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아니라 한 세대의 계몽은 개인의 노력보다는 사회문화적인 요인에 더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상대가 있으면, 그 상대를 악마화하고 배척하기보다는 상대편 또한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자들이라고 간주하는 편이 낫다. 바꿔 말하면, 노인층(혹은 보수적 가치관을 가진 이들)은 공동체, 권위, 순수성에 할당하는 도덕적 자원이 공정성, 자율성, 합리성에 할당하는 도덕적 자원보다 더 많은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층과 의견을 달리 할 수는 있지만, 이를 틀렸다고 말하기는 다소 어려워진다.

물론 대학로에서 계엄령 발동을 외치는 애국보수들[3]에게 쉴드를 쳐주고자 이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 얘기하자면, 그들의 도덕 관념은 많이 비뚤어져 있으며, 그들이 민주주의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 민주주의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혐오하는 젊은층이 가지고 있는, 우월하다고 믿는 도덕 의식은 시대가 변하면서 얻게된 사회문화적 혜택일 뿐이다. 우리는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이 도덕 의식을 새롭게 이용할 수는 있겠지만, 이게 노인 세대를 배척하고 혐오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3.
민주주의는 의견이 다른 이를 하나의 적법한 상대로 인정할 때 강화된다. 그게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견제하며 작동하는 방식이다. 상대방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배척해서는 안된다. 오바마가 지적했듯, 정치적 의견이 달라도 하나의 팀이라는 의식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위험에 빠진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노인 인구를 “틀딱”이라는 멸칭으로 배척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지난 대선에서 젊은층을 외면하고 박근혜에게 표를 몰아줬던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는 한국 인구의 13%가 넘는다. 물론 13% 속에는 소위 말하는 “갓플란트”[4]도 있겠지만, “틀딱”이라는 멸칭은 너무나 쉽게 “한 팀”의 상당수를 수준 미달의 2등 시민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젊은이들을 만나기 위해 대학로를 찾고, 강남역 맛집을 찾아가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들려주고자 하는 노인들의 계획이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다소 씁쓸했다.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고자 하는 그들의 방식이 젊은 세대의 시선에서 볼 때 우스꽝스러웠던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들은 대화를 하고자 했다.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은 지루하고 답답한 과정이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다. 설득은 변화를 느리게 만들지만, 그렇게 이루어진 변화여야만 그 성과가 현실에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다.

미셸 오바마는 “그들이 낮은 곳으로 향할 때, 우리는 높은 곳으로 향합시다.”라고 말했다. 젊은층이 비난하는 노인들이 전근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낮은 곳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까지 그들을 “틀딱”이라고 멸시하며 함께 낮은 곳으로 떨어질 필요는 없다. 아니, 필요가 없는 수준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그래서는 안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지점은 지금보다 조금 더 높은 곳이고,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도덕 의식은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디딤돌이 될 때 진정으로 더 나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1. 나는 이 개념을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읽었다. 플린 효과에 대한 이 글에서의 서술은 그 책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사람은 그 책을 보면 된다.  ↩

  2. 이 또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 베껴 적느라 힘들었다.  ↩

  3. 사실 이 글은 방학동의 한 한의사가 쓴 글을 보고 쓴 것이다.  ↩

  4. 갓(God)과 임플란트의 합성어. 젊은 세대와 가치관을 공유하는 노인들을 뜻한다. 사족이지만, 혐오스럽지 않은 노인이 경제적으로 유복한 노인과 병치된다는 건 꽤나 씁쓸하다.  ↩